KOREAN ENGLISH

대한민국의 독도 해상에서 펼쳐지는 에어 레이싱에 참가하여 코스를 완주하는 동안 전투기의 선회, 상승, 하강, 회전을 이해하고 빠른 시간 안에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목표다. 이를 통해 앞으로 전투에 참가하기 전 전투기의 움직임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Extra 3300은 독일의 프로펠러 비행기이다.
에어 레이스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고양력 날개를 사용하도록 개조되었습니다. 에어쇼, 비행 훈련 등의 다양한 상황에서 운용되고 있습니다.
분쟁은 파키스탄이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있었던 데서 촉발되었다.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은 종교를 같지만 거리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고, 인종과 문화, 언어, 경제 등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여기에 정부의 불균형적인 정책으로 정부의 주요 요직에는 서파키스탄 사람들이 앉았고 경제를 지배했다. 그리하여 훨씬 잘 살게 된 서파키스탄은 멀리떨어진 동파키스탄을 하나의 식민지처럼 여겼다.인구가 훨씬 많은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중앙정부 역할을 축소시키고 지방 자치정부의 권한을 대폭 증대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파키스탄의 집권자가 의회의 개회를 무기한 연기시키고 민주화 요구를 짓밟아버리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런 주장을 펼치는 반정부운동자들을 색출해 처단토록 했다.파키스탄 군대는 지식인들과 동파키스탄에서 거주하던 힌두교의 교도들을 색출하고 피의 대숙청을 감행하는가 하면, 선량한 주민들에 대하여 강간과 학살 등 온갖 악질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게릴라를 조직해 항전을 벌이면서 내전이 발발하고 이 과정에서 대량의 피난민이 생겨나 인도의 국경을 넘으면서 인도와는 또 다른 갈등을 빗는다. 한편, 피난민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인도는 국제사회에 피난민 문제의 해결을 위한 지원을 호소했는데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 정부의 비인도주의를 세계에 알렸다. 또한 동파키스탄의 피난민과 게릴라를 보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려보내 파키스탄 정부에 대한 게릴라 활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인도 입장에서는 파키스탄의 내전이 싫지만은 않은 입장이었다.

인도의 그러한 행동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파키스탄은 결국 전쟁을 결행한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권력을 잡은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정권은 국민들의 커다란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어떤 기폭제가 필요했다. 새로운 권력자가 생각한 것은 ‘리오 갈레고스’라는 지역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700Km나 떨어진 ‘말비나스 섬’(Islas Malvinas)의 지배권을 되찾는 일이었다.

이 섬은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의 열강에 의해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다. 영국이 최초 발견을 한 후 프랑스가 차지하더니 나중에는 아르헨티나를 점령한 스페인이 이 섬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이 아르헨티나로부터 떠나고 아르헨티나가 독립하자 스페인의 지배아래에 있던 이 섬 역시 아르헨티나가 승계 받았다. 이후 아르헨티나가 이 섬으로 독일인 상인을 보내 기지를 설치했지만 그들은 불법적인 어선 나포와 해적 행위를 일삼자 이에 분노한 미국이 함선을 보내 해적 기지를 파괴했다. 하지만 해적은 완전하게 소탕되지 않았고 다시 영국이 주변 해역의 안전보장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함을 보내 이 섬을 군사력으로 점유하면서 해적이 소탕되었다.

해적을 소탕한 후 영국은 이 섬으로 자국민을 보내 정착하게 했고 지금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아르헨티나로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이 섬의 지배권까지 승계를 받았다는 점을 들어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했고 오히려 영국이 무력으로 섬을 빼앗은거라 주장했다. 반면 영국은 오래 전부터 자국민이 정착해서 실효지배를 하고 있는 점을 내세워 아르헨티나의 요구를 묵살했다.

결국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아르헨티나의 병력이 이 섬에 상륙해 주둔해 있던 영국군을 포로로 잡으면서 무력 분쟁이 발생하고 만다.

레바논의 기독교 지도자인 ‘카멜 줌블라트(Jumblatt)’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피살되자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간에 심각한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내전에 이르게 된다. 이 상황을 틈타 이스라엘에서 박해받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고 난민캠프 만들어지고 여기에 자리 잡은 이들이 팔레스타인 해방전선(PLO)이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어 이스라엘에 게릴라 활동을 벌인다. 한편 PLO의 등장으로 레바논 내의 이슬람 세력이 증가되어 내전이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전황이 계속해서 변모하자 결국 레바논 내의 세력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던 시리아가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레바논에 군대를 파견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PLO의 게릴라에 이은 시리아의 레바논 내전 개입이 결정 되자 이스라엘은 결단을 내린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에 있는 PLO를 축출하고 시리아를 제압하면서 레바논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에 두기 위한 거대한 작전을 수립하고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로 진격하기로 한다.
이스라엘의 지상군은 작전에 따라 베카 계곡을 지나는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와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 간에 연결된 고속도로를 장악하기로 하는데 이 고속도로를 통해 시리아의 지상군 증원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시리아 역시 대규모 지상군을 원활하게 레바논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이 고속도로를 지킬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지상군의 진격을 유효하게 막아낼 수 있어야 했다. 이에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대규모 기갑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엄청난 수의 대전차 화기를 비롯한 기갑부대 대응 병력을 베카 계곡에 집중시켰고 이스라엘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공중 폭격 작전을 수립하지만 시리아는 이전 중동전쟁때 이스라엘이 지대공 미사일에 매우 취약했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시리아 지상군 보호를 위해 지대공 미사일 부대를 대규모로 배치한다.

냉전시대의 종결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면을 불러왔지만 일부의 지역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의 소동이나 종파가 다른 종교지도자들 간의 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국지적인 냉전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조지아와 남오세티야의 관계 역시 다른 분쟁 지역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혁명으로 권력을 거머쥔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거액의 군사원조를 받아내는데 성공하고 유럽연합에 조지아의 NATO 가맹 합의까지 이끌어 낸다. 그 후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독립투표에서 독립찬성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만 조지아 정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의 강제합병 음모’로 비난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조성한다.

그로부터 2년 후, 결국 조지아는 ‘아시아에서 펼쳐지는 세계의 평화 제전’을 틈타 기습적으로 남오세티야 점령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파리에서 개최되는 에어쇼의 파일럿이 되어 전투를 통해 획득한 기체 조작에 대한 경험을 관람객들에게 자유롭게 마음껏 선보일 수 있습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 비행으로 에어쇼의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십시오.